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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의 밀알, 약사 고미애

이한열기념사업회, 2018년 <보고 싶은 얼굴전>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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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기념사업회
기사입력 2018-10-12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지역 회원이자 ‘주거권 실천을 위한 부천시민연합’ 회원, ‘부천지역 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 약대교회 새롬공부방 선생님 그리고 약사 등 도시 빈민들과 영세 시민들 속에서 ‘더불어 삶’을 실천하다가 1992년 2월 12일, 불법 체류 외국인의 폭행으로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고미애 약사의 이야기가 26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우리 곁에 왔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연세대 이한열 학생을 기억하고, 그의 뜻을 이어가고자 운영되고 있는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지난 11일 ‘제4회 보고 싶은 얼굴’전을 개막, 12월 31일까지 전시를 이어간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우리 사회 민주화와 부조리를 위해 싸워온 고미애·권문석·권미경·이덕구·장현구·최옥란 의사자들. 그 가운데 고미애 약사는 부천에서 활동한 인물로 그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이한열기념사업회의 협조를 얻어 스토리 펀딩에 올린 글 전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1992년 2월 14일자 한겨레신문에 “이웃사랑 약사의 안타까운 죽음” 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지난 5일 오후 8시께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아람약국에서 불법 체류자인 필리핀인 산토스(20)로부터 폭행을 당해 뇌사상태에 빠졌던 고미애(28) 씨가 12일 부천시내 성가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 가을체육행사를 정리하다 총학생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오른쪽 아래 안경 쓴 이가 고미애 약사     ©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설 연휴 기간 동안 혼자 약국을 지키고 있던 고미애 약사는 부근 공장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로부터 목이 졸리고 구둣발로 심하게 구타를 당한 채 약국에서 발견되었다. 악몽 같은 일이었다. 고미애의 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뇌사상태로 누워있다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들은 성가병원 응급실에서 9시간동안 쑥뜸을 뜨며 소생을 간절히 빌었다.


작은 키에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작은 체구였지만 고미애 약사는 그 안에 뜨거운 불덩어리를 품고 있었다. 더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열정을 채 풀어보지도 못한 채 한줌의 재로 한강에 뿌려진 고미애 약사.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1965년 부산에서 조금은 보수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자랄 때 유난히 몸이 자주 아팠다. 천문기상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결국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약사가 되었다.


1984년 숙명여대 제약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 2학년 때는 합창반 활동을 했다. 고미애는 목소리가 고왔으며, 피아노와 기타를 제법 잘 쳤다. 3학년 때에는 그의 성실함을 알아본 친구들의 추천으로 제약학과 부학회장을 맡게 되었다. 4학년 때 학생회장 후보로 등록을 할 때에도 아버지가 만류하였으나 그녀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아버지도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고미애는 올바르다고 믿는 일은 행동으로 옮겼으며, 한번 내린 결정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다. "


때는 바야흐로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남영동에서 고문으로 숨진 후 당국에서는 이를 은폐하려고 갖은 꼼수를 부리고 있었다. 거리는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다.

 

고미애는 그때까지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무고한 학생의 죽음은 그를 시위현장으로 불러냈다.

 

약대 학생회장을 맡은 그는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자 연세대에서 시위를 이어갔으며, 6월 10일에는 숙대생 6천 명 중 4천명과 함께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다. 내면의 불덩어리가 점화되었다.

▲ 졸업을 앞두고 총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들과 설악산 MT. 앞 줄 오른쪽이 고미애 약사   ©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1987년 유월항쟁은 고미애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더 큰 세상의 변화를 꿈꾸게 되었다. 1988년 졸업한 그는 ‘가진 자만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없는 자들은 제대로 약 한번 제대로 못 사먹는 벽을 허물기 위해’ 도시빈민지역의 약국으로 들어간다.

 

성남의 열린약국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그 경험을 살려 1989년 부천의 공단지역에 아람약국을 개업했다.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공단 노동자 자녀들을 위해 개설된 새롬공부방에서 자원교사로 봉사하였다. 그의 별명은 ‘꽃사슴 선생님’.  


그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의 지역보건분과장으로 전국을 누볐으며 ‘부천지역 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 철거민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고자 했던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천시민연합’의 상담실장으로도 일했다.

 

그와 번갈아가며 약국을 보았던 동료는 그가 “하루 약국 일을 14시간씩 하면서도 한 달 생활비 20만원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보람 있는 일”에 쓰기 위해 꼬박 저축을 하였다고 한다.  

 

▲ 고미애 약사의 대학 졸업 사진. 이 사진은 영정사진으로 사용되었다. © 이한열기념사업회

장례식에서 만난 이들은 고미애가 수많은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고 깜짝 놀랐다. 28세에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될 줄 알고 그랬을까? 더욱 애처로운 것은 고미애 약사는 6년 동안 사귀었으며, 결혼해 함께 지역에서 활동하기로 약속한 약혼자가 있었고 그는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고미애의 죽음으로 한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서워하고 범죄자 취급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인도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외국인노동자들을 미워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한 진료 봉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부천과 성남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사회적 약자이면서 범죄자로 낙인찍힌 외국인 노동자들을 품는 단체들이 여럿 결성되었다.

 

"고미애의 죽음이 밀알이 된 것이다." 


유월 항쟁 30주기에 맞춰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시흥 분회 회원들은  ‘이웃사랑 고미애 약사상’을 제정하여 지역사회에서 약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에 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고미애 약사상’을 제정하며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려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 고미애 약사가 일하던 약국 앞에서 치러진 노제 모습    ©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부천희망재단 김범용 이사 촬영

 

신은미 작가, 고미애의 삶 그려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고미애 약사를 신은미 한국화 작가가 표현했다. 신은미는 고운 한복을 입고 전통음악 선율에 맞춰 즉석에서 한국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6시 내고향’의 리포터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신세대답게 발랄하게 펼치며 소통하는 작가이다.


전시회 제막식이 열린 10월 11일 저녁 6시 신은미 작가의 멋진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고미애 약사의 숭고한 삶과 만날 수 있는 ‘2018 보고 싶은 얼굴’전에서 함께 만나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기사와 사진 자료를 제공해주신 이한열기념사업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이한열기념관에서 만난 보고 싶은 얼굴4회 전시회의 주인공 스토리는 현재 1화 이웃사랑의 밀알, 약사 고미애 2화 최저임금 1만원 알바연대 권문석의 꿈 3화 뇌성마비 1급 장애인에게 세상은 벽이었다 4화 팔에 쓴 유서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5꽃밭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6화 제주4.3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등의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라 있으며, 스토리 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episode/45154)이 진행 중입니다. 애독자 여러분께서도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고미애 약사상 제정과 부천시민신문의 기록

▲ 좌로부터 신문 1. 고미애 약사의 사망소식과 외국인 불법 체류자 문제를 다룬 <부천시민신문> 1992년 2월 17일자(제21호) 기사/ 신문2. 고미애 약사 사망 1주기를 맞아 제정된 ‘고미애 약사 기념상’ 제정 소식을 보도한 <부천시민신문> 1993년 2월 10일자(제67호) 기사/ 신문3. 제3회 고미애 약사상 수상 소식을 보도한 <부천시민신문> 1995년 2월 16일자(제168호) 기사. 고미애 약사는 <부천시민신문> 창립 발기인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 부천시민신문


고미애 약사와 관계된 부천시민신문의 기사는 1992년 2월 17일자(21호), 고미애 약사 사망의 원인이 된 외국인 불법체류 문제를 지적한 <젊은 여 약사의 충격적 사망>을 비롯해 1993년2월 10일자(67호) <고미애 약사 기념상 제정>,  1995년 2월 16일자(168호) <제3회 고미애 약사상에 약대글방> 등 3회 등장한다.
기사에 따르면 고미애 약사 사망 후 1993년 2월 7일 1주년 추도식 때 생전의 그녀가 활동하던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분회(회장 직무대행 최문숙)는 고미애 약사의 지역사회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1회 고미애 약사 기념상’을 제정, 부천주거연합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역시 기사에 따르면 2회는 삼정동 쓰레기 소각장 건설 반대 투쟁에 앞장서온 푸른마을회 이연리 회장이 수상했으며, 3회는 지역 도서운동 확산에 일조한 약대글방이 받았다. 이후 고미애 약사상은 기록이 없어 진행여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다 고미애 약사상이 다시 부활한 것은 창립 51주년을 맞은 부천시약사회(회장 이광민)가 지난 2017년 6월 3일 오후 6시 30분 부천시약사회관에서 개최한 ‘부천시약사회 50년사 출판 기념식 및 홈커밍데이 행사’에서다. 
약사회는 첫 수상자로 부천희망재단 아동보호사업을 선정했으며, 고미애 약사에 대해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고미애 약사와 이 사건에 대해 잘 아는 지성수 목사가 멀리 호주에서 날아와 증언해주었다.
올해(2018년) 1월에 열린 두 번째 고미애 약사상 시상식에서는 아시아인권문화연대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 당시 보도된 신문 기사들     © 부천시약사회 자료 및 부천시민신문 자료
▲ 고미애 약사의 졸업사진과 대학시절 사진     © 부천시약사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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