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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지역신문 탄생과 <부천시민신문>

[NEW부천시민신문] 창간 12주년 기념 특별기고
“지방자치가 발전할수록 지역언론의 역할과 책무는 더욱 중차대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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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 편집주간 ·시인
기사입력 2021-07-26

<부천공보> 180호의 비밀

▲ 1970년 8월 발행된 부천공보 180호(좌), 1987년 8월 1일 발행된 부천소식(가운데), 1988년 12월 1일 원혜영 전 의원이 창간한 부천소식 창간호(우)   © 부천시민신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올해가 벌써 <NEW부천시민신문> 창간 12주년이다. 지역신문(언론)의 발전은 지방자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지역신문의 효시라 할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0일 창간되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부터 드리워지기 시작한 제국주의의 먹구름은 결국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실현을 100여년 퇴보시켰다. 마찬가지로 지역언론의 발전도 그만큼 늦어졌다고 본다. 

 

언론의 기능을 가진 ‘신문’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부천에서 현재와 같은 신문 형태로 발행된 매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부천공보(富川公報)>로 추정된다. <부천공보>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시절, 공보실에서 발행된 부천군 홍보지로 보인다. 

 

부천문학도서관에 소장돼있는 <부천공보> 180호를 살펴보면 발행일자는 1970년 7월 31일로 발행인 노창현, 편집인 문종혁으로 기록돼 있으며, 발행처는 부천군 공보실, 판형은 타블로이드판(18*38)으로 4면으로 구성되었다.

 

내용을 보면 1면에는 노 군수가(기사에는 군수의 이름이 없음) 8일간의 일본 농촌을 시찰하고 왔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또한 부천군 소래면 대야리 YWCA 버들캠프장 개관식(1970년)에 육영수 여사가 다녀갔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 외, 병충방제를 위한 부읍장 회의, 농사에 관한 알림의 기사도 있다.

 

2면에는 하루 2만 톤을 생산한다는 복숭아 이야기와 자동차운송사업 서비스 기간, 3면에는 ‘하곡수매가 대폭 인상, 농촌계몽대회, 공군 제1기 조종사 모집 기사가 실렸다. 4면에는 부천 출신 사진작가 장경내의 ‘귀가’라는 수필이 한 편 실렸다. 그 외에도 부천고시 제93~99까지 공유수면 점용 허가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지방에서 발행된 시정홍보지라고 보기에는 편집 디자인도 수준급이고, 기사 내용도 전문가 뺨칠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특히 사진 배치나 신문 구성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서울의 변두리, 한 군(郡)에서 만든 한 장의 공보물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공보지는 발행주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신문에는 반드시 일간, 주간, 월간 등 발행주기를 적도록 하고 있다. 지령이 180호인 점을 감안하면 역사가 퍽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한 군(郡)에서 발행한 공보지가 일간, 또는 주간일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월간인데 180호가 1970년 7월 31일자면 적어도 1955년 쯤 창간된 것으로 짐작된다.  

 

1955년, 한 지방에서 공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홍보용 신문이지만 부천은 일찍이 깨어있는 마을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군(郡)에서 발행한 월간 신문이었지만 의식이 있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언제 창간했는지, 언제 종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외에도 부천이 시 승격이 되고 <부천소식(1987.8.1.)>, <복사골 시정소식(1989.4.15.)>에 이어 현재의 <복사골 부천> 등의 시정 홍보지를 창간, 발행했다.

 

부천 최초 <부천신문>

 

그렇다면 부천에서 본격적인 지역신문이 발행된 것은 언제일까? 1988년은 한국에서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이다. 때는 전두환 정부에서 노태우 정부로 정권이 이양되던 때였다. 그해 말,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인 12월 1일, 정치에 꿈을 안은 한 청년이 부천시 남구 심곡1동 746-24호에 부천사회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타블로이드 8면의 <부천신문>을 발행한다. 그 청년이 바로 5선 국회의원과 부천시장을 역임한 원혜영이다. 

 

그는 창간호에서 “복사골의 신문고가 되겠다”며 부천의 여러 가지 어려운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문을 발행한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이 신문을 통해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솔직하게 담아내겠다는 편집방향을 밝히고 있다.

 

창간호 1면에는 “교실난 심각, 국교 22곳 2부제 수업, 과밀학급에 교원까지 부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2면의 <기획특집>에서는 부천역을 통해 하루에 15만 명이, 역곡역을 통해 8만 명이 이동한다는 소위 ‘지옥철’의 실상을 파헤쳤다. 불과 33년 전, 부천의 현실이다.

 

그 외에도 “내년 전화 적체 완전 해소”, “시(市) 연탄 34만톤 확보”, “소사역 건립하라” 등의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띤다. 당시의 부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부천신문>은 본격적인 지역신문 출발의 토대가 되었다. 시대상을 반영한 매우 귀중한 향토자료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지역신문 등록 1호 <부천신문>

▲ 지역신문 등록 1호 <부천신문>, 시민주로 탄생한 <부천정론시민신문>, 중동 신도시 개발을 맞아 (주)부천시민신문사에서 발행한 중동신문 창간호 1면   © 부천시민신문

 

해가 바뀌고, 6개월 뒤인 1989년 7월 12일, 당시 12대 국회의원이던 박규식 의원이 향지빌딩(원미동 소재, 원미어울마당 앞)에 부천신문사를 설립하고, 경기도청에 등록된 공식 지역신문인 <부천신문>(1989년 2월 2일 등록번호 다 798호. ‘다’는 주간지를 의미)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현재도 발행되고 있는 이 신문은 ‘대판 크기(40*56)’로 전체 지면은 16면이었다. 발행에 앞서 이 신문은 1989년 6월 19일 대판 4면의 “부천신문 창간 임박!!” 제하의 창간준비호를 발행하였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부천신문>이란 제호로 두 개의 신문이 발행된 셈이다.   

 

박규식 의원(사장)은 창간사를 통해 “정치적으로는 중립성을 지키고 진실만을 보도한다”고 밝혔다. 초대 부천예총 회장을 역임한 최은휴 시인은 <순수의 언어를 빚는 향도> 라는 제목의 축시를 써 기고했다. 

 

<부천정론시민신문>의 탄생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89년 8월 6일에는 원혜영 의원을 비롯한 의식 있는 사회단체 인사들이 모여 <부천정론시민신문>(1989년 7월 12일 등록, 등록번호 다 953호) 창간호를 발행한다. 역시 대판 16면으로 부천신문과 같았다. 발행인을 맡았던 서예가 강희대 선생은 창간사를 통해 “이 신문이 민족의 횃불이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1면에 기사 대신 사진작가 김수군 선생이 부천역 집표원 손은택 씨를 모델로 촬영한 ‘부천의 새벽을 여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사진 1장을 실었다. 수도권을 운행하는 대중교통으로 이용자가 가장 많았던 전철은 ‘지옥철’로 불리며 새벽부터 생업현장으로 달려가는 ‘민초들의 발’이 되고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목을 끌었다.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발표하며 부천에 거주하던 소설가 양귀자 씨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성주산 메아리’ 칼럼을 통해 “우리만의 입과 귀를 지니게 된 것이 기쁘다”는 소감을 남겼다. 

 

사진작가 김영학의 ‘비상하는 새들의 날개’ 사진과 함께 필자가 쓴 축시 ‘복사골 이 땅에도’는 5면에 수록되었다. 특히 이 신문은 월북작가 정지용 시인이 해방 전 부천으로 이주해 약 3년간 거주하면서 소사성당을 마련한 사실 등을 가장 먼저 보도했으며,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의 부천 행적에 대한 특보를 실어 관심을 끌었다. 

 

특히 <부천정론시민신문>은 재력이 있거나 정치에 꿈은 둔 그 누군가가 만든 신문이 아니라 ‘시민주(株)’ 발행으로 탄생했다. 평범한 회사원, 종교인, 시장 노점상인, 문화예술가, 법조인, 상공인, 의사, 약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80% 이상)이 10만 원 이하의 소액 출자를 해 말 그대로 ‘시민의 신문’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잘나가던 때 <부천정론시민신문>의 연간 구독자는 5천여 명에 육박했으며, 중동 신도시 개발과 더불어 자매지 <중동신문>을 창간, ‘중동 전문지’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99년 10월 제396호를 마지막으로 <내일신문>과 합병해 <부천내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면서 <부천정론시민신문>은 부천에서 막을 내렸다.  

 

그 뒤 <부천시민신문>이라는 제호가 2회 정도 다시 등록되기는 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현재 제호를 살린 것은 20년 뒤인 2009년 7월 30일자로 창간된 <NEW부천시민신문>이다. 인터넷 신문을 먼저 등록하면서 <부천시민신문>이란 제호를 사용했기에 지면신문에는 살짝 NEW라는 단어를 삽입해 제호로 등록하였다. 

 

그동안 세월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되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200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지역신문은 운영자금난을 겪으면서 점차 감소한 반면, 새롭게 인터넷 언론이 주류 미디어로 자리를 잡으면서 지역언론도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발전할수록 지역언론의 역할과 책무는 더욱 중차대해진다는 사실, 따라서 미래 한국언론의 주역은 지역언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터넷 언론 <부천시민신문>과 <NEW부천시민신문>은 ‘문화도시 부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기록하는 정론지로서 언론정신과 시대사명을 잊지 않을 것이다. 

▲ NEW부천시민신문 창간호. 자원봉사자를 비롯해 각계 활동가 43명의 얼굴을 담았다.   © 부천시민신문

 

*위 자료는 모두 부천문학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무단 복제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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